한국인의 깊은 상처를 온 몸으로 껴안은 아흔의 일본인
  • Nomura Motoyuki
  • 2015 APA 수상자 [필란트로피스트] 부문
  • 2019.11.05
“청계천을 중심으로 그곳에 모여든 하층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로부터 귀중한 인생을 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덕분에 나의 인생은 부유했습니다.”
부모님은 일본이 군국주의화하고 있었을 때부터 사회적 기독교 운동(social gospel movement)의 초기 운동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에서는 불온한 인물을 감시하고 단속하는 특별 고등경찰이 있었는데, 마치 한국의 박정희 군사 독재 정부의 KCIA(남산)과 같이 무서운 조직이었다. 일본 권력가에서는 부모님이 위험한 인물이었다. 전쟁중에도 나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도시샤 대학(Doshisha Univ.)과 시인 윤동주와 친한 교제가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에 이끌려 윤동주의 시타쥬쿠에 갔던 적이 있었다.
내가 자란 쿄토시내의 니시진 Nishijin 지구에는 조선인 하층 노동자 가족들이 대부분 이었다. 차별받고 박해받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던 조선인 하층 노동자 가족과 그들을 조롱하고 차별하고 멸시하는 일본인을 나는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고, ‘Something must be wrong !’ 이라는 의식을 갖고 바라보았다. 조선인 여자 아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에 가지 않았다. 조선인 남자 아이 두 명이 나와 6년간 같은 초등학교 같은 반에 있었다. 그들이 차별받고 부당하게 취급되는 것을 보면서 어린 나 나름대로 의분을 느끼고 있었다. 도쿄 수의 축산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한국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1년째가 되었다.
광주 근처 출신의 김옥남이라는 유학생이 재학중이었는데, 고향으로부터 송금이 끊어져 생활이 곤란하였다. 그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하숙집을 구하는 일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일본도 경제적으로 좋지 않았다. 배급미와 의료품을 김옥남과 나누고 아르바이트 일자리도 찾아 둘이 함께 살았다. 1953년~61년까지 나는 몹시 가난한 유학생으로서 미국에서 세 개의 신학교와 대학원에서 접시닦이를 하면서 다녔다. 유학 당시 나를 Jap 과 차별적인 용어로 불리며 모욕적인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경험은 일본에서 목격한 한국인의 차별과 부당함에 대한 나의 어릴 적 체험과 겹쳐져 귀국 후에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인생을 보내야겠다고 결의했다.

그러한 목적으로 1968년에 처음 한국을 방문했고, 1973년에는 가족 전원을 동반해 한국을 방문했다. 도시 산업 선교회의 소개로 청계천을 방문했는데 그곳에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 제정구씨도 함께 있었다. 청계천 빈민촌을 위해 필요로 한 자금을 확보C하기 위해 도쿄도내의 주택지를 매각하였고 현재의 한촌 벽지의 원생림에서 살게 되었다.
미국의 신학교나 교회에서 배울 수 없었던 귀중한 인생을 사는 귀중한 방법을 한국의 청계천을 중심으로 그곳에 모여든 각지의 농어촌과 대도시에서 하층의 삶을 살아 온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인생은 부유했다.
연지동에 있는 여성 전도 봉사회의 일부인 약자 구원 선교 봉사회의 기초를 만들어, 매일 2천명의 미취학아동에게 20년간 급식을 주도록 도왔다. 이를 위해 혼자 독일로 건너가 독일 교회의 원조를 얻고, 급식과 유아 교육 시스템의 기초를 확립할 수 있던 것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감사해야 할 봉사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Nomura Motoyuki
2015 APA 수상자 [필란트로피스트] 부문
1931년 일본에서 출생하였고 일본 내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목격한 이후 한국에 대한 봉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찾아 빈곤문제를 다루는 한국정부와 시민들의 시각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장애 아동을 돕는 일에도 적극 동참하며 국경을 넘어 필란트로피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