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anthropy
Fellow
단단하고 올곧은 한 그루의 APA 나무를 심는다는 마음으로
지금부터 당신과 함께 APA 6번째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STORY
  • Nomura Motoyuki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Poverty
    “청계천을 중심으로 그곳에 모여든 하층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로부터 귀중한 인생을 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덕분에 나의 인생은 부유했습니다.”
    노무라 모토유키 씨는 일본 내 차별받고 멸시 당하는 조선인 하층 노동자들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목격하면서 ‘뭔가 잘못 되었다’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후 미국 유학시절, 가난한 동양인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한 그는 일본 내 조선인들이 받았던 차별과 부당함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면서 일본 식민지 정책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인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1960년대 후반 청계천 빈민운동을 하는 故 제정구 의원을 만나 한국의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해 일본인이 저지른 과거 잘못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약 12년 간 한국을 50여 차례 방문해 청계천 도시빈민을 대상으로 빈민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일본은 물론 독일, 뉴질랜드 등까지 지원을 호소하고 나섰으며 그 결과 무려 7,500만엔(약 8억원)을 모금을 이루어냈다. 아흔의 노인이 된 그는 ‘청계천 빈민 구제 활동만으로 속죄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은여생을 더욱 겸허한 자세로 한국인들에게 배우고, 또 더욱 사랑 하며 살겠다는 그 의 다짐 속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그는 십여년 간 청계천의 삶을 기록한 귀중한 역사자료를 서울시에 기증했고, 그 자료는 <노무라 리포트>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일본인으로서 한국을 향한 그의 사죄 활동은 빈민 지원활동에 한정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한국의 장애아동과 북한 어린이를 돕는 운동을 펼치며, 일본인들의 역사인식 문제를 비판하는 공개적 발언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2년에 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놓인 소녀상 앞에서 "봉선화"를 플롯으로 연주하며 군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갈수록 우경화하는 일본에서 이러한 활동을 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다. 일부 우익들은 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욕설을 퍼붓고 밤중에 협박전화까지 하지만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노무라 씨는 위안부 소녀상을 찾아 속죄하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농성장을 방문하는 등, 한국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찾아 빈곤문제를 다루는 한국정부와 시민들의 시각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
    아흔의 노인이 된 그는 ‘청계천 빈민 구제 활동만으로 속죄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은여생을 더욱 겸허한 자세로 한국인들에게 배우고, 또 더욱 사랑 하며 살겠다는 그 의 다짐 속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 Nomura Motoyuki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Poverty
    “청계천을 중심으로 그곳에 모여든 하층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로부터 귀중한 인생을 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덕분에 나의 인생은 부유했습니다.”
    노무라 모토유키 씨는 일본 내 차별받고 멸시 당하는 조선인 하층 노동자들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목격하면서 ‘뭔가 잘못 되었다’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후 미국 유학시절, 가난한 동양인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한 그는 일본 내 조선인들이 받았던 차별과 부당함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면서 일본 식민지 정책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인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1960년대 후반 청계천 빈민운동을 하는 故 제정구 의원을 만나 한국의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해 일본인이 저지른 과거 잘못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약 12년 간 한국을 50여 차례 방문해 청계천 도시빈민을 대상으로 빈민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일본은 물론 독일, 뉴질랜드 등까지 지원을 호소하고 나섰으며 그 결과 무려 7,500만엔(약 8억원)을 모금을 이루어냈다. 아흔의 노인이 된 그는 ‘청계천 빈민 구제 활동만으로 속죄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은여생을 더욱 겸허한 자세로 한국인들에게 배우고, 또 더욱 사랑 하며 살겠다는 그 의 다짐 속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그는 십여년 간 청계천의 삶을 기록한 귀중한 역사자료를 서울시에 기증했고, 그 자료는 <노무라 리포트>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일본인으로서 한국을 향한 그의 사죄 활동은 빈민 지원활동에 한정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한국의 장애아동과 북한 어린이를 돕는 운동을 펼치며, 일본인들의 역사인식 문제를 비판하는 공개적 발언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2년에 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놓인 소녀상 앞에서 "봉선화"를 플롯으로 연주하며 군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갈수록 우경화하는 일본에서 이러한 활동을 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다. 일부 우익들은 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욕설을 퍼붓고 밤중에 협박전화까지 하지만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노무라 씨는 위안부 소녀상을 찾아 속죄하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농성장을 방문하는 등, 한국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찾아 빈곤문제를 다루는 한국정부와 시민들의 시각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
    아흔의 노인이 된 그는 ‘청계천 빈민 구제 활동만으로 속죄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은여생을 더욱 겸허한 자세로 한국인들에게 배우고, 또 더욱 사랑 하며 살겠다는 그 의 다짐 속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 Nomura Motoyuki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Poverty
    “청계천을 중심으로 그곳에 모여든 하층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로부터 귀중한 인생을 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덕분에 나의 인생은 부유했습니다.”
    노무라 모토유키 씨는 일본 내 차별받고 멸시 당하는 조선인 하층 노동자들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목격하면서 ‘뭔가 잘못 되었다’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후 미국 유학시절, 가난한 동양인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한 그는 일본 내 조선인들이 받았던 차별과 부당함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면서 일본 식민지 정책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인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1960년대 후반 청계천 빈민운동을 하는 故 제정구 의원을 만나 한국의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해 일본인이 저지른 과거 잘못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약 12년 간 한국을 50여 차례 방문해 청계천 도시빈민을 대상으로 빈민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일본은 물론 독일, 뉴질랜드 등까지 지원을 호소하고 나섰으며 그 결과 무려 7,500만엔(약 8억원)을 모금을 이루어냈다. 아흔의 노인이 된 그는 ‘청계천 빈민 구제 활동만으로 속죄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은여생을 더욱 겸허한 자세로 한국인들에게 배우고, 또 더욱 사랑 하며 살겠다는 그 의 다짐 속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그는 십여년 간 청계천의 삶을 기록한 귀중한 역사자료를 서울시에 기증했고, 그 자료는 <노무라 리포트>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일본인으로서 한국을 향한 그의 사죄 활동은 빈민 지원활동에 한정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한국의 장애아동과 북한 어린이를 돕는 운동을 펼치며, 일본인들의 역사인식 문제를 비판하는 공개적 발언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2년에 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놓인 소녀상 앞에서 "봉선화"를 플롯으로 연주하며 군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갈수록 우경화하는 일본에서 이러한 활동을 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다. 일부 우익들은 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욕설을 퍼붓고 밤중에 협박전화까지 하지만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노무라 씨는 위안부 소녀상을 찾아 속죄하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농성장을 방문하는 등, 한국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찾아 빈곤문제를 다루는 한국정부와 시민들의 시각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
    아흔의 노인이 된 그는 ‘청계천 빈민 구제 활동만으로 속죄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은여생을 더욱 겸허한 자세로 한국인들에게 배우고, 또 더욱 사랑 하며 살겠다는 그 의 다짐 속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 Nomura Motoyuki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Poverty
    “청계천을 중심으로 그곳에 모여든 하층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로부터 귀중한 인생을 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덕분에 나의 인생은 부유했습니다.”
    노무라 모토유키 씨는 일본 내 차별받고 멸시 당하는 조선인 하층 노동자들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목격하면서 ‘뭔가 잘못 되었다’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후 미국 유학시절, 가난한 동양인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한 그는 일본 내 조선인들이 받았던 차별과 부당함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면서 일본 식민지 정책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인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1960년대 후반 청계천 빈민운동을 하는 故 제정구 의원을 만나 한국의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해 일본인이 저지른 과거 잘못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약 12년 간 한국을 50여 차례 방문해 청계천 도시빈민을 대상으로 빈민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일본은 물론 독일, 뉴질랜드 등까지 지원을 호소하고 나섰으며 그 결과 무려 7,500만엔(약 8억원)을 모금을 이루어냈다. 아흔의 노인이 된 그는 ‘청계천 빈민 구제 활동만으로 속죄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은여생을 더욱 겸허한 자세로 한국인들에게 배우고, 또 더욱 사랑 하며 살겠다는 그 의 다짐 속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그는 십여년 간 청계천의 삶을 기록한 귀중한 역사자료를 서울시에 기증했고, 그 자료는 <노무라 리포트>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일본인으로서 한국을 향한 그의 사죄 활동은 빈민 지원활동에 한정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한국의 장애아동과 북한 어린이를 돕는 운동을 펼치며, 일본인들의 역사인식 문제를 비판하는 공개적 발언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2년에 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놓인 소녀상 앞에서 "봉선화"를 플롯으로 연주하며 군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갈수록 우경화하는 일본에서 이러한 활동을 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다. 일부 우익들은 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욕설을 퍼붓고 밤중에 협박전화까지 하지만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노무라 씨는 위안부 소녀상을 찾아 속죄하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농성장을 방문하는 등, 한국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찾아 빈곤문제를 다루는 한국정부와 시민들의 시각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
    아흔의 노인이 된 그는 ‘청계천 빈민 구제 활동만으로 속죄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은여생을 더욱 겸허한 자세로 한국인들에게 배우고, 또 더욱 사랑 하며 살겠다는 그 의 다짐 속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 Nomura Motoyuki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Poverty
    “청계천을 중심으로 그곳에 모여든 하층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로부터 귀중한 인생을 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덕분에 나의 인생은 부유했습니다.”
    노무라 모토유키 씨는 일본 내 차별받고 멸시 당하는 조선인 하층 노동자들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목격하면서 ‘뭔가 잘못 되었다’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후 미국 유학시절, 가난한 동양인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한 그는 일본 내 조선인들이 받았던 차별과 부당함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면서 일본 식민지 정책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인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1960년대 후반 청계천 빈민운동을 하는 故 제정구 의원을 만나 한국의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해 일본인이 저지른 과거 잘못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약 12년 간 한국을 50여 차례 방문해 청계천 도시빈민을 대상으로 빈민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일본은 물론 독일, 뉴질랜드 등까지 지원을 호소하고 나섰으며 그 결과 무려 7,500만엔(약 8억원)을 모금을 이루어냈다. 아흔의 노인이 된 그는 ‘청계천 빈민 구제 활동만으로 속죄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은여생을 더욱 겸허한 자세로 한국인들에게 배우고, 또 더욱 사랑 하며 살겠다는 그 의 다짐 속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그는 십여년 간 청계천의 삶을 기록한 귀중한 역사자료를 서울시에 기증했고, 그 자료는 <노무라 리포트>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일본인으로서 한국을 향한 그의 사죄 활동은 빈민 지원활동에 한정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한국의 장애아동과 북한 어린이를 돕는 운동을 펼치며, 일본인들의 역사인식 문제를 비판하는 공개적 발언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2년에 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놓인 소녀상 앞에서 "봉선화"를 플롯으로 연주하며 군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갈수록 우경화하는 일본에서 이러한 활동을 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다. 일부 우익들은 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욕설을 퍼붓고 밤중에 협박전화까지 하지만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노무라 씨는 위안부 소녀상을 찾아 속죄하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농성장을 방문하는 등, 한국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찾아 빈곤문제를 다루는 한국정부와 시민들의 시각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
    아흔의 노인이 된 그는 ‘청계천 빈민 구제 활동만으로 속죄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은여생을 더욱 겸허한 자세로 한국인들에게 배우고, 또 더욱 사랑 하며 살겠다는 그 의 다짐 속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 Nomura Motoyuki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Poverty
    “청계천을 중심으로 그곳에 모여든 하층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로부터 귀중한 인생을 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덕분에 나의 인생은 부유했습니다.”
    노무라 모토유키 씨는 일본 내 차별받고 멸시 당하는 조선인 하층 노동자들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목격하면서 ‘뭔가 잘못 되었다’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후 미국 유학시절, 가난한 동양인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한 그는 일본 내 조선인들이 받았던 차별과 부당함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면서 일본 식민지 정책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인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1960년대 후반 청계천 빈민운동을 하는 故 제정구 의원을 만나 한국의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해 일본인이 저지른 과거 잘못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약 12년 간 한국을 50여 차례 방문해 청계천 도시빈민을 대상으로 빈민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일본은 물론 독일, 뉴질랜드 등까지 지원을 호소하고 나섰으며 그 결과 무려 7,500만엔(약 8억원)을 모금을 이루어냈다. 아흔의 노인이 된 그는 ‘청계천 빈민 구제 활동만으로 속죄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은여생을 더욱 겸허한 자세로 한국인들에게 배우고, 또 더욱 사랑 하며 살겠다는 그 의 다짐 속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그는 십여년 간 청계천의 삶을 기록한 귀중한 역사자료를 서울시에 기증했고, 그 자료는 <노무라 리포트>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일본인으로서 한국을 향한 그의 사죄 활동은 빈민 지원활동에 한정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한국의 장애아동과 북한 어린이를 돕는 운동을 펼치며, 일본인들의 역사인식 문제를 비판하는 공개적 발언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2년에 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놓인 소녀상 앞에서 "봉선화"를 플롯으로 연주하며 군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갈수록 우경화하는 일본에서 이러한 활동을 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다. 일부 우익들은 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욕설을 퍼붓고 밤중에 협박전화까지 하지만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노무라 씨는 위안부 소녀상을 찾아 속죄하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농성장을 방문하는 등, 한국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찾아 빈곤문제를 다루는 한국정부와 시민들의 시각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
    아흔의 노인이 된 그는 ‘청계천 빈민 구제 활동만으로 속죄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은여생을 더욱 겸허한 자세로 한국인들에게 배우고, 또 더욱 사랑 하며 살겠다는 그 의 다짐 속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