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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고 올곧은 한 그루의 APA 나무를 심는다는 마음으로
지금부터 당신과 함께 APA 6번째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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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r Vietnamese Stature Foundation
    “베트남 어린이와 청소년, 여성들을 위한 교육권과 건강권을 지원하는 데 더욱 헌신하겠습니다.”
    2014년 베트남에서 설립된 단체인 For Vietnamese Stature Foundation(이하 VSF)는 행정자치부가 설립 및 허가하여 교육, 평등, 보건과 관련된 SDG를 강조하고 SDG의 목표 달성에 기여하는 비영리 재단이다. 이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아래 네 개의 주요 프로그램을 구현하였다.

    학교 우유 프로그램: 어린이들 사이에서 질병, 저개발,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영양실조와 미량 영양소 결함들을 개선하기 위해 VSF는 국가의 학교 우유 프로그램을 실천한 베트남의 최초이자 하나뿐인 NPO입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나이의 소외계층 아이들이 학교 우유를 매일 마시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적 자원을 동원하였고, 아동의 영양 권리를 일깨우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젊은 인재 육성 프로그램: VSF는 교육 및 보건에 대한 권리를 증진시키기 위한 학생 또는 지역사회 주도 계획들을 위한 펀드와 기술 지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육과 자기개발에 있어 평등한 기회를 확립하기 위해 소외 계층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합니다.

    생식연령의 여성들을 위한 의료 프로그램: VSF는 여성과 주주를 위해 신체 및 정신 건강 관리에 대한 많은 태도변화 소통 캠페인과 역량 구축 활동들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산업지역 노동자들을 위해 이동식 건강 검진센터를 진행하였다. 2018년에는 하노이 탕롱산업지구(Thang Long Industrial Zone)에서 검진을 하여 약 800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다녀갔다. 그 결과 70%가 성병에 걸린 것으로 밝혀졌다.
    필란트로피 활동: 자연재해가 발생한 지역의 인도적 지원활동, 소외계층을 위한 기반시설(학교, 도로, 교량) 구축, 극도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에게 월별 보조금 지급 등을 진행 중이다.
    VSF는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활동(개발 프로그램과 필란트로피 활동)이 모두 기본적으로는 인권, 특히 아동의 권리를 증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 유형 중 하나에만 초점을 맞춘 베트남의 다른 NGO들과 달리 두 가지 유형의 활동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또한 활동이 항상 사람들의 목소리, 능력, 그리고 독립성의 강화에 기여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선한 삶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필란트로피 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지역사회의 역량을 강화하자는 열망을 가지고, VSF는 항상 다음과 같은 원칙과 관행을 확실히 하였다. 수혜자는 프로젝트의 모든 단계(설계, 기금 조성, 구현, 모니터링 및 평가)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이 때 VSF는 민간 부문과 개인 자선가 사이에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과 지역 사회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즉, 민간 부문과 지역사회 개인은 VSF의 프로그램/프로젝트를 위한 전문성, 시간, 자금 등을 포함한 많은 종류의 지원을 하며, 이는 VSF와 다른 NPO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VSF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깊게 생각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내부 관계자들과 지역 사회의 관계자들과 함께 행동하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VSF의 자원 동원 전략은 베트남의 다른 NPO들과 매우 다르다. VSF는 개인과 기업의 지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하고 혁신적인 기금 모금 캠페인/활동을 개발하고 시행해왔다. 예를 들면, 가족들이 와서 함께 즐기고, VSF의 자선 활동에 대해 배우고, 기금 모금 활동에 참여하는 가족 축제를 조직하거나, 사람들이 자선 활동에 자금을 기부하기 위해 중고/신제품을 기부하고 구매할 수 있는 자선 박람회(온라인 및 오프라인 모두)를 구성, VSF의 후원자 네트워크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스토리텔링, 공책, 행운의 돈 봉투, 기금 모금을 위한 티셔츠 등의 제품을 제작, 수천만 동(VND)의 기금 모금 가치를 지닌 특별 제품 경매, 자선 가치를 전파하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대중 매체와 협력 등 이러한 창의성과 차이를 통해 거의 하루 만에 VSF에 놀라운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2017년에 있었던 가족 축제에서는 Nghe An 지역의 학교 우유 프로그램을 위한 15억동(VND)을 모금하였으며, 이를 통해 암으로부터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전달하였다.
  • 안종길
    "대학의 명확한 발전상과 이를 이루기 위한 발전기금이 합을 이루어 간다면, 대학은 물론, 캠퍼스를 넘어 사회 곳곳에 선한 영향력을 뻗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양대 안종길 팀장은 모든 모금 활동은 “'기부자의 관점'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충당하자'라는 모금가 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라는 원칙하에 모금 명분서 작성에 깊이 관여를 하였다. 특히, 새로운 대한민국의 성장동력- Beyond the Engine of Korea”라는 슬로건을 만들고, 대한민국의 힘이 되는 인재, 힘이 되는 연구, 힘이 되는 대학으로 혁신과 변화에 앞장서고자 하는 명분서를 작성하였다.
    한양대 안종길 팀장은 모든 모금 활동은 “'기부자의 관점'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충당하자'라는 모금가 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라는 원칙하에 모금 명분서 작성에 깊이 관여를 하였다. 특히, 새로운 대한민국의 성장동력- Beyond the Engine of Korea”라는 슬로건을 만들고, 대한민국의 힘이 되는 인재, 힘이 되는 연구, 힘이 되는 대학으로 혁신과 변화에 앞장서고자 하는 명분서를 작성하였다.
    그 결과 10 개의 모금아이템으로 모금만찬 “한양, 힘이 되는 밤” 행사에서 평균 한 해 기부액 규모인 400여명이 161 억원을 당일 모금 만찬에서 이루어 내는 성과를 이루어 냈고, 이로 인해 당해 연도에 총 280 억원에 가까운 모금실적을 올렸다. 특히, 장학기금에서 큰 성과를 이루어 냈는데, 2015 년 총기부자중 장학 기부인원이 1,428 명에서 2016 년 1,727 명으로 2017 년도에는 1,901 명으로 꾸준하게 증가하는 성과를 올렸다. 무엇보다도 캠페인 이전에 4,480 여명(3 년 평균)의 연간 기부인원이 캠페인이후 5,151 명으로 약 14% 증가하였다.
    주요 동문들과의 오찬, 만찬 그리고 기업방문을 통한 반복적, 전략적 관계형성 등 4 년 동안 총 220여건의 Move Management 성사 실무 책임자로 팀장의 역할이 있었다. 또한, 평소에는 거액 잠재기부자 관계형성과 모금요청에 필요한 모든 분들의 회사와 개인적 관련 자료 들을 매일 국내 220 여개 언론사의 기사를 취합하는 대행사를 통해 검색하여 꾸준하게 프로파일을 업데이트 하면서, 회사 창립기념일과 기념일, 생일에는 미리 확인하여, 화환과 축하를 통해 대학을 인식시키는 섬세한 면도 발휘하였다. 특히, 기업체의 VIP 마케팅팀의 벤치마킹을 통해 개인별 취향에 맞추어 개별 예우를 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타겟팅 예우에서도 특별한 감동을 통해 감사를 표현하였다. 생일에는 부부를 위한 건강식 칼슘 쌀과 자연산 미역 그리고 플로리스트가 직접 꾸민 화려한 꽃바구니를 통해 감사의 뜻을 전할 때 기부자들의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무엇보다도 지속적으로 수년 동안 도움을 주신 기부자들에게는 대학에서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나눔교수” 위촉을 통해 학위가운 증정으로 최고의 예우를 갖추면서 학생들에게 특강을 통해 도전정신과 글로벌 마인드를 갖게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후, 2017 년 10 월에는 8 개월간의 준비 끝에 또 한번의 모금만찬행사, “한양, 힘이 되는 밤– 동문 기업인들과의 만남” 행사를 통해 약 397여명이 참석하고 당일 70억원의 모금약정의 성과를 올렸다. 이 자리에서도 꾸준하게 대학에 도움을 주신 동문기업인들에게 최고의 상인 “한양 기업인상”을 수여함으로써 기업인으로서 영예로운 예우를 갖추었다.
    거액 모금캠페인이후 이를 대중으로 확산하기 위한 모금캠페인으로 전 교직원, 학생을 대상으로 캠페인명칭을 공모하여 “동행한대”모금캠페인을 기획 출범시켰고, 이 캠페인 만을 위한 뉴스레터 타블로이드판 잡지 “동행한대”를 동시에 창간하여 모든 기부자들에게 기부소식을 통한 감동과 기부 지출에 대한 내역을 직간접적으로 전달하였다. 이 결과 소액기부자들도 점차 증가하여 첫 해인 2016년 240명의 기부자를 통해 1억원에 가까운 생활장학금을 모았고, 2017년에도 직접 동문들에게 전화하는 Phone 캠페인을 통해 총 449명이 총 2억 5천만원에 가까운 생활장학금을 유치하였다. 이를 위해 1975 학번부터 2004학번 중 약 2만명 동문을 대상으로 재학생 모금가 13명과 컨설팅 3 명과 함께 직접 전화를 통해 장학금과 생활장학금을 요청하는 캠페인으로 확대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 한양대 2016, 2017 년 중앙일보 종합평가 교내외 장학금 지급액이 258억에서 274억으로 16억원 증가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2018년에도 275억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특히, 가계곤란학생 장학금을 위해 주요동문 기업인들이 1대1 매칭에 참여하여 시작된 장학금 제도를 통해 이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학업에 열중할 수 있도록 지원제도를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로 인해 재학생 등록금대비 장학금 수혜비율이 매년 41%에 가까우며, 재학생 인원대비 장학금 수혜비율은 52%로서 적어도 재학생의 반은 소액부터 고액까지 장학금을 받는데 기여를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소액기부자를 위한 예우에도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캠페인 시작부터 매년 동행한대 음악회와 기부자 초청 영화 관람 등 다채로운 행사를 통해 소액기부자를 위한 예우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빈센트 반 고흐가 남긴 말 중 “위대한 성과는 소소한 일들이 모여 이루어 진 것이다 “라는 말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산다고 한다. 작은 관심과 보이지 않는 개별적 맞춤형 예우 사례를 통해 기부자들에게는 기억과 감동을 수혜자에게는 감사의 마음을 느끼고, 먼 훗날에 꼭 받은 만큼의 이상을 되돌려 주기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그의 비결이다.
  • 조현비
    “저와 같은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참 기쁩니다.”
    조현비 학생은 정체성 위기로 고통받는 청소년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싶었다. 특히 다문화 배경과 성소수자 청소년들의 정신적 혼란을 덜어주고 그들의 인권을 보호해주고 싶었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가 미국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8년간 살다가 한국에 돌아와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문화적 충격을 오랫동안 겪었기 때문이다. 그는 본인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의 외로움을 잘 이해하고 도와주고 싶었다.

    특히 학교내 클럽 Social Justice League에 들어가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면서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외로움과 고통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한국에서의 성 불평등이 미국보다 훨씬 심하다는 것을 느끼고 여성의 인권을 더 존중하는 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인권 옹호를 위한 핀과 스티커를 팔아 900,000원의 기금을 마련하여 지파운데이션에 생리대를 기부하기도 하였다. 학교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 전환 가능성에 대한 교육 자료와 설문지를 만들어 직접 실험 연구를 하였고 그 연구논문을 통해 학교 성교육 과정에 성소수자 내용을 포함하려는 근거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학교 성교육 과정의 변화를 유도하였다.

    본인이 사랑하는 음악을 통해 자선음악회를 직접 열거나 참여하여 기금마련을 통해 불우한 환경에 있는 어린이들을 위한 예방접종 의료지원을 포함한 다양한 지원을 하고싶었다. 또한 장애인, 불우한 환경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음악을 연주하고 책을 읽고 대화하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모두가 각자의 존엄을 갖고 존중하며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또한 음악봉사를 단지 연주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음악 심리 치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음악 치료용 CD를 제작하여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들려주며 자신의 감정을 조금씩 제대로 이해하고 풀어나가며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프리카 잠비아의 생태마을 조성을 위한 기금마련 자선 음악회에서 모은 1,000만원은 직접 잠비아로 가져가 그곳의 책임자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그 기금이 의료품과 예방접종 백신을 구입하는데 사용하고 생태마을 조성을 위한 장비를 사는데 쓰임을 확인하였다.
    이상희 & Friends 자선음악회, IXTUS 음악 봉사 오케스트라, 그리고 에코맘 코리아 자선음악회의 기금마련 행사에 참여하여 국제백신연구소에 기부하였으며, 공주 소망공동체와 베트남 선교 활동, 환경 단체에도 기금을 전달하였다.
  • Girija Nandan Girija Satish
    “간디의 정신을 이어받아 인도 전역에 필란트로피적인 사회를 구현해내고 싶습니다.”
    인도 Nav Bharat Jagriti Kendra(이하 NBJK)의 창립 멤버인 Girija Nandan Girija Satish 회장의 필란트로피 여정은, 당시 15살짜리 학생으로서 가뭄 해소를 위해 인도 오디샤 칼라한디 지역으로 봉사활동을 떠났던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 마하트마 간디의 유명한 제자인 산 비노바가 1955년에 시작한 간디 단체인 삼안웨이 아슈라마, 보드가야와의 인연 덕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1967년에 간디주의의 아이콘인 제이 프라카쉬 나라얀(Jay Prakash Narayan)의 지도 하에 다시 비하르의 사람들을 위해 기근 구제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대학시절에는 공학대학인 BIT-신드리(BIT-Sindri)에 입학하여 간디 이념을 신봉하는 학생 모임인 간디건설노동위원회를 결성했다. 1969년에 대학 캠퍼스에서 간디 백주년을 기념했다. 호스텔의 학생들은 스스로 봉사하였고, 값싼 채식주의 음식을 위해 간디 미사를 시작했으며, 도움을 주기 위해 과외, 가난한 동료를 위해 도서관을 빌려주었으며, 국어 사용 장려를 위해 힌디어로 된 매체로 시험을 보았다. 간디 철학과 실천으로 가득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학부 졸업시험 후, 1970년 제이 프라카쉬 나라이안(Jay Prakash Narayan, 이하 JP) 선생을 만나 사회 복지를 위해 내 인생을 바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1971년 Nav Barat Jagriti Kendra(NBJK)라는 조직을 설립하는 데 동기부여가 되었고, 이를 지지했다. NBJK는 새로운 인도를 위한 자각 센터(Awakening Center for New India) 라는 뜻이다. 조직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보카로 제철소(Bokaro Steel Plant)에서 전기 엔지니어로 일했다.
    1974년 인도에서 학생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JP가 주도한 운동에 참여했고, 군복무에서 제명되었다. 1975년에 비상체제가 불거졌고 이후 1977년에 새 정부가 들어선 후 그제서야 그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직장에 대한 흥미를 잃은 Girija Satish 회장은 NBJK의 비전과 사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보카로 제철소를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그때부터 단체에 헌신하였다.
    NBJK의 비전은 평등, 우애, 상호 도움의 가치에 기반한 진보적이고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이며, 미션은 농촌 빈곤층이 사회 정의, 경제 성장, 자립을 위한 해방세력으로서 발전을 촉진하도록 교육, 조직,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JP는 1977년에 록 사미티를 창설했는데, 록 사미티(Lok Samiti)는 관료와 선출직 대의원들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려는 목표를 가진 시민들의 평화적이고 비정치적인 조직이다. 이와 파트너 관계로서 NBJK를 지원하며, 네트워킹 및 거버넌스에 관한 프로그램으로 록사미티를 강화시키기도 하였다.
    NBJK 설립 이후 소규모 NGO를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300개 이상의 자발적 조직을 촉진하고 2017-18년 동안 25명의 사회 활동가들에게 역량 구축 교육을 제공하였다. 이들은 250개 마을의 약 6000여명과 함께 식품안전에 관한 일을 했으며, 750명의 젊은이들에게 기술개발, 1054명에게 IGA 지원을 제공했다.
    또한 2017년부터 2018년까지 1년간의 소규모 캠페인을 진행하여 가족 상담 센터로 69건의 가족 간 갈등을 해결하였으며, 54명의 어린이를 위한 구조 개입, 15,000명이 참여한 주류 반대 캠페인, 지역의 문화 개선을 위한 다양한 활동 등을 진행하였다.
    그는 앞으로의 우선순위를 백내장으로 인한 실명, 문맹을 제거하는데 두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지역의 농부들의 수입을 늘리고, 특히 소녀들과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교육 시설을 만들고자 고민 중이라고 한다.
  • 김숙임
    “결국 핵심은 대화와 소통입니다.”
    1990년대 남북여성 토론회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방위비 삭감을 위한 연대모임’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6·15여성본부’ 등 여성 평화운동의 현장에서 평화군축운동의 기틀을 닦아온 김숙임 조각보 대표. 지난 200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후보로도 이름을 올렸던 그는 조각보의 비전을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 여성’을 키워드로 꼽는다.

    그는 2007년까지 일했던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창립 무렵을 떠올린다. 1990년대 중후반 무렵 북한이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탈북자가 급증하였고 마침 창립 시점과 맞아떨어져 단체에서 탈북여성 실태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때 만난 여성들과 ‘진달래무궁화’라는 이름의 남북여성 월례 모임을 만들었다. 그때는 전체 탈북자가 90여명 수준이라 매달 모이는 여성의 숫자가 3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지금과 비교하면 아주 소박한 규모다.
    그러다 2000년 6·15공동선언이 이루어지면서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에서도 남북여성교류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당시 북한 측에서 탈북여성과 계속 관계한다면 교류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피력해 진달래무궁화 모임은 정리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은사님이자 여성평화운동의 상징이셨던 고(故) 이우정 선생께서 한국에 와 있는 이 소수의 여성들도 포용하지 못하면서 남북여성교류를 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강력한 유감을 표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와중 김숙임 대표는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가 남북여성교류의 창구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제한적인 조건에서나마 행사도 열고 활동도 많이 했는데, 심적으로 아주 힘든 기간으로 기억한다. 가슴에 대못이 박힌 기분, 그래도 탈북여성들과 인간적 교류까지 끊긴 건 아니어서 나중에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활동을 정리하면서 그들과 새로운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동포 조선족도 자연스럽게 합류하면서 조각보가 출범하였다.
    “북한 출신뿐만 아니라 조선족 다문화가정 출신, 분쟁지역 여성까지 다 포함해 함께 가는 운동을 꿈꿉니다. 이젠 국가의 경계를 넘어 초국가적으로 여성평화운동을 펼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임에선 기지촌 여성들을 지원하는 두레방이나 이주 여성들을 돕는 코시안의 집, 이슬람권에서 작은 도서관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매진피스 등 다양한 커뮤니티와도 만나고 있는데, 결국 핵심은 대화와 소통입니다.”
    경험상 평화에 대한 그의 접근은 상당히 신중하다. 특히 흔히 통칭되는 ‘탈북’이나 ‘북한 이탈’ 등의 배제적 용어가 사라졌으면 한다. 대신 ‘북한 출신’ 정도면 적당하지 않냐는 의견이다. 한국전쟁 당시 삼촌이 군인으로 전사하고 외삼촌 세 명 모두 전쟁 중 사망한 가족사로 어릴 때부터 할머니, 외숙모에게서 전쟁의 상흔을 익히 보아온 그는 “6·25로 4~5가구 중 1가구꼴로 사상자가 나는 등 전쟁의 트라우마가 강한 이 땅에서 전쟁의 상흔을 아직도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은 건강한 삶을 방해하는 치명적 요소”라고 안타까워한다.
    “진정한 평화란 궁극적으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것 아니겠어요? 남북 여성 모임인 진달래무궁화모임을 통해 음식 얘기부터 부부싸움, 이혼 등 실제 여성들의 삶을 주제로 얘기하고 있어요. 가부장제와 얽힌 여성의 문제는 참 공통점이 많지만, 한편에선 남북 여성 모두 의식의 진전으로 주도적인 결혼생활을 하려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대화를 통해 자연스레 남녀 간 문제가 전체 사회문제로 연결되고, 대안도 제안하죠.”

    2011년 8월 5일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 여해문화공간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모습을 드러낸 ‘조각보’는 누구나 즐겁고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일상 속 평화통일운동을 지향한다. 발족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지난해 11월 발생한 연평도 포격 사태에 대한 충격을 연말 여성 송년모임에서 토로하면서부터다.

    그는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평화운동, 통일운동, 여성운동 모두에서 중요한 큰 줄기, 더 많이 주목받아야 하는 이슈라 생각한다. 평화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별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처럼, 코리안 디아스포라 차원의 운동도 인내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규모를 보자면 700만 동포 중에 414만명이 유라시아, 동북아 동포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이 사람들에게 한국 국적을 잘 내주지 않고, 일반 시민들의 인식도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한국 내 외국인이 160만에서 180만 정도인데 그중 80만에서 100만명 사이가 이주동포다. 분명 소수자이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면 소수자가 아니기한 이들이 평화통일운동에서 얼마나 주체적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향후 한반도 평화의 맥락이 달라진다고 그는 믿는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에피소드도 많고 잊지 못할 일들도 많다는 그. 남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위험한 상황에서 일하다 보니 문화적 차이로 인한 해프닝도 많았다고 한다. “한국에 온 코리안 디아스포라 여성들 중 남편이 때리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고 여자는 당연히 맞는 것으로 알다가 남한에 와보니 이것이 가정폭력이라는 것을 알고 헤어졌다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면서 자기의 삶을 이해하고 여성으로서 당당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하시죠. 사소하게는 탈북 여성들이 프라이팬을 보고 때가 낀 것으로 알고 철수세미로 박박 밀어서 코팅을 하얗게 벗겨놨다는 식의 이야기도 들었죠.” 차이와 다름을 실감하는 와중에도 그에게는 북한을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기회였다고 한다. 북한 이외에도 사할린, 우즈베키스탄, 일본 등을 다니면서 이주동포들의 친척도 만나고 그 가족과도 함께 지내면서 이해도를 높였다.
  • 이금연
    “그거에요, 제가 하는 일은 그저 연결일 뿐이죠.”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금연 활동가는 살면서도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지금 그의 생활이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의 방식이 무엇일까 하는 근원적인 생각 때문일까? 대안적 삶을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를 염원하는 이들이면 누구나 다 하게 되는 고민일 텐데, 그는 실존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나 홀로’ 방식을 선택하였다고 말한다.

    그가 네팔에 도착한 지 열흘 만에 지진이 발생하여 긴급 구호를 시작했고, 그 이후 피해 지역을 찾아다니며 구호물자를 배포해야 했다. 몇 개월간은 현장을 찾아 가는 구호 활동을, 이후엔 깨진 학교들을 복구하거나 새로 짓는 일을 하게 되어 임시 거처로 삼았던 피정 집 하숙 생활이 자꾸 연장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어느덧 일 년 반을 넘겼고 지진관련 활동을 하다 보니 ‘내가 왜 네팔로 오게 되었지?’와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이 한꺼번에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음지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권운동가다. 1987년 국내 이주노동자의 인권운동을 시작해 그 때 만난 이주노동자들과의 인연으로 2000년대부터 네팔의 한센병 및 불가촉천민 아이들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어색해하며, 과거의 이금연이 누구인지 묻는 질문에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고 말한다.

    그는 2000년 초기부터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것을 지원하였으며 2005년에는 노동하는 어린이들을 만났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하다가 돌아간 활동가들이 노동하는 어린이들을 구출하고 학교에 보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계기로 2006년부터 장학금 지원을 시작하였다.
    그는 2005년에 있었던 기후 변화로 인한 갑작스런 한파 때 긴급구호기금을 모아 2005년 12월에 다딩(Dhading) 지역 마하데브베시(Mahadevebesi)라는 곳에 가서 300가정의 노동자 가족들에게 의류와 담요를 지원한 것이 계기로 하여 네팔을 지속적으로 방문 중이다. 처음부터 학교와 어린이들에게 집중했다. 함께 지원해주시고 관심 가지셨던 사람들을 위해 활동을 하면서 겪었던 경험을 나누면 젊은 활동가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책도 펴낸 그. 바로 [네팔의 아이들과 학교 이야기-히말라야에서 온 편지]라는 책이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연결’이라고 표현한다. “제가 어떤 일을 한다는 건 도움을 주시는 분들의 마음을 필요한 곳으로 연결한다는 의미에요. 그거에요, 제가 하는 일은 그저 연결일 뿐이죠.”

    그가 보기에 요즈음 일이라 함은 돈을 낸 사람이 한 건지, 연결한 사람이 한 건지, 학교를 지은 사람이 한 건지, 아니면 거기서 조직한 사람이 한 건지 알기가 힘들다. 정말 모두가 합심해야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그 일들은 모두가 함께 하는 거고 공동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공동선을 추구하는 시대인 것 같고, 공동선의 원리, 인간존엄성의 원리, 참여의 원리, 연대성의 원리. 이 원리들이 활동의 근간이자 지침이다.
    그의 일들은 모두 연결이 되어 시작이 된 일이다. 후원자들은 우선 그의 지인들이 많다. 또 지인들이 전해주는 소식을 듣고 후원자가 되는 모르는 분들도 있다. 장학재단, 교회 여러 작은 기금들에서도 도움을 받고 있다.
  • 故백수남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양재기술을 가르치며 ‘은성원’의 가장 나이 많은 가족으로 불우여성과 더불어 살다가 하늘의 부름을 받는 것이 유일한 소망”
    “할머니가 이화고녀(이화여고)를 나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이다. 30대에 홀로 된 후 종로에서 양장점을 운영해 큰돈을 벌었다. 1953년 서울 영등포 신길동 자리에 할머니 세례명을 딴 데레사 모자원을 짓고 자선 사업을 했다. 처음에는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와 엄마들을 위한 모자복지 사업을 벌였다. 산업화 시대인 1960년대에는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나이 어린 여성들이 윤락에 빠지지 않도록 이·미용, 양재, 가정부 교육 같은 직업 훈련을 시켰다. 76년에 사회복지법인 은성원이 됐다.”

    “할머니가 이화고녀(이화여고)를 나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이다. 30대에 홀로 된 후 종로에서 양장점을 운영해 큰돈을 벌었다. 1953년 서울 영등포 신길동 자리에 할머니 세례명을 딴 데레사 모자원을 짓고 자선 사업을 했다. 처음에는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와 엄마들을 위한 모자복지 사업을 벌였다. 산업화 시대인 1960년대에는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나이 어린 여성들이 윤락에 빠지지 않도록 이·미용, 양재, 가정부 교육 같은 직업 훈련을 시켰다. 76년에 사회복지법인 은성원이 됐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상처입은 여성, 가난한 여성, 소외된 여성들이 그 상처와 가난을 오히려 삶의 자산으로 만들고 그 자산을 받침돌로 삼아 존엄하고 아름다운 삶의 건축물을 쌓아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복지법인 WING(Women Initiative Networking Growing) 최정은 대표(공적상 대리수상)의 말이다.
    일제하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넉넉한 여건속에서 일본으로 유학, 디자이너 공부까지 마쳤던 백수남 원장은 43년 해방 2년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는 여성의 사회참여, 특히 남편을 잃은 여성으로서 사회활동은 꿈도 꿀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29세의 젊은 나이로 양장점을 열고, 2남 1녀를 키우며 주위의 질시와 호기심을 참고 이겨내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10년 동안 양장점 경영에 매달렸던 백수남 여사는 전쟁이 끝나고 급증한 전쟁 미망인들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공감하여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피난당시인 52년, 이웃으로 눈을 돌리면서 그들의 아픔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백수남 원장은 그 동안 모았던 사재를 털어 지금의 WING이 위치한 서울 신길동일대의 대지와 가옥을 매입하고 23세대의 미망인 가족들을 맞아들였다. 이렇게 첫발을 디딘 「데레사모자원」은 12년동안 많은 이들이 자활해나가는 중간 기착지가 됐고,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65년에는 「재단법인 은성원」으로 변신하면서 불우여성의 직업보도활동 기관이 되었다. 이어 그는 76년에는 「은성원」을 사회복지법인으로 등록, 보다 깊이있는 사회사업을 목표로 삼기에 이르러 80년대에 이르러서는 불우여성은 물론 일반주부들까지 폭넓게 공부할수있도록 하였다.
    85년에 있었던 한 인터뷰에서는 “한 사람으로서 좋은 일을 한다는 소박한 마음, 또한 남보다 돈이나 지식, 기술을 더 많이 가진데 대한 감사의 보답으로 일을 시작했다”는 그. “여성을 위한 복지사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시작, 오히려 배우는 입장이었다”며 겸손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한창 자녀들이 사춘기였을 때 불우여성들의 신변보호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살기까지 했던 백수남원장은 “무조건 사랑을 주면 아무리 나쁜 마음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작고 전까지 은성원을 거쳐간 이들로부터 스스럼없이 ‘할머니’로 불렸다. ‘부녀복지사업의 길로 인도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뿐’이라고 말하는 백수남 할머니는 71세 당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양재기술을 가르치며 ‘은성원’의 가장 나이 많은 가족으로 불우여성과 더불어 살다가 하늘의 부름을 받는것이 유일한 소망”이라고 말했다.
  • 이현승
    “공익 마케터, 펀드레이저 그리고 Change Maker”
    이현승 팀장은 아름다운가게, 세이브더칠드런을 거치며 비영리의 다양한 활동들을 캠페인과 마케팅으로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아이디어부터 기획, 실행까지 진행하면서 모금가의 덕목에 대해서도 더 고민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동력을 만드는 사람 “공익 마케터, 펀드레이저 그리고 “Change Maker”라는 생각으로 더 많은 영향력과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 기증부터 모금 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꾸준한 성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많은 미션을 부여받아 모금 성과를 이루는 동시에 비영리단체가 당면한 자원개발에 관하여 ‘가지 않은 길’을 기꺼이 열고 이끌어가는 모금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구체적으로는 아름다운가게의 매장 수익활동을 위한 기증사업 전략 수립, 기증캠페인(아름다운 아파트, 나눔학교, 아름다운 우리동네 캠페인, 일일가게 등), 기업 캠페인(아름다운토요일, 맞춤형 사회공헌활동 캠페인 기획, 공익연계마케팅 등), 모금캠페인(놀라운가게, 긴급모금, 고액모금) 을 기획, 진행하였다.

    고액기부 관리의 경우 ‘아름다운가게 후원이사회’의 총괄 운영 및 기획을 맡아 법적인 책임이 있는 이사회와는 달리 순수하게 아름다운가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이사장, 상임이사님의 네트워킹을 통해 모인 후원 모임을 꾸렸다. 사회에 명망 있거나 아니면 그룹 CEO 부인회 정도의 고액기부가 가능한 인물들로 구성된 이 모임을 매월 기획하고 관리하면서 매년 1회 이상의 고액기부 모금을 위한 바자회 기획 및 후원 요청을 개별적으로 진행하였다. 참여자에 대한 정보 및 참여관리를 집중하여 로열티를 높이고 그들의 관계망을 모으는 형식으로, 후원자들로 하여금 신규 후원자들을 끌어올 수 있는 전략을 펼쳤으며 개별적인 친분은 물론 편하게 식사도 하면서 아름다운가게를 위한 모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개인 고액기부자 클럽을 활성화하였다.
    아름다운가게와 같은 비영리 조직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는 그. 수평조직을 지향하고 자발적인 업무 형태를 추구하다 보니 15명의 국원들을 관리하면서 모든 사업을 총괄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팀장들과 함께 팀원들의 역량을 강화하고 코칭하였다고 한다. 후원개발사업과 배분사업의 통합적인 운영을 위해 ‘나눔 중심 사고’를 강조하고 ‘기증’과 ‘모금’사업이 경쟁구도가 아닌 통합적인 하나의 팀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관계 중심 팀으로 재편하였다. 이 과정에서 팀원들의 이해를 구하고 조직간의 갭을 줄이기 위해 솔직한 대화와 경청으로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모두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가는 팀빌딩과 운영 방향 설정을 통해 사업 전략 수립 전, 팀워크를 위한 하나의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단지 사업에 대한 개인적 기량만 뛰어날 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비영리조직을 위한 활동가들의 역할, 건강한 모금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며 방법을 모색하는 개척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열정과 성과들로 한국 모금가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고 있다.
  • 김범용
    "나눔은 세상을 공익적으로 변화시키는 최고의 가치이며 점점 더 핵가족화 되어가는 시대에 공동체를 복원시킬 수 있는 핵심가치"
    2009년경, 지역의 공익 단체나 개인들이 재정 부족으로 효율적인 활동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 김범용 상임이사는 이를 지원하고자 고민해왔다. 그 때 시민사회 관계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기존에 실행중인 여러 기관들을 방문하며 벤치마킹하여 지금의 부천희망재단을 설립하는 핵심 멤버가 되었다.

    부천희망재단은 다양한 방법으로 모금을 진행하고, 이것을 부천에서 활동하는 공익적인 일을 하는 단체나 개인에게 지원한다. 즉 지역사회의 시민의식의 성장과 공동체 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개인 및 단체가 돈이 없어 그만두어야 할 처지에 있을 때 그 기관을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사람과 기관만이 아니라 부천시를 위한 공익적인 아이디어가 있을 때도 이를 실현시키고 파급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다.

    김범용 상임이사는 이렇게 경기도 최초의 민간주도형 지역재단을 설립해 이끌어온 점과 1% 나눔운동, 월급끝전모으기, 희망리어카 등 다양한 모금아이템에 대한 아이디어로 개인, 기관, 기업의 다양한 기부참여를 이끌어 낸 성과를 인정받았다.
    또한 기부금을 언제나 투명하게 관리하여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인터넷을 통해 공개하였으며, 기부자들에게는 음악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 초대와 더불어 특별한 경험을 조성하였다. 이 활동을 통해 부천시는 기부와 나눔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게 되었으며 나눔과 기부의 도시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모금을 기획하여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조명하고 해결할 때 가장 보람있다고 말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변화할 수 있는 지점들을 발견하고 이를 지원하여 그들이 혜택을 입고 달라지는 것을 보면 그 과정에서 있었던 어려운 점들은 자연스레 극복이 된다’고 한다.

    그는 부천희망재단이 민간에서 발현된 지역재단이다 보니 지역의 자원을 모아 지역 내에서 활동하고, 지역 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가장 관심이 있다. 그에게 나눔은 세상을 공익적으로 변화시키는 최고의 가치이며 점점 더 핵가족화 되어가는 시대에 공동체를 복원시킬 수 있는 핵심가치다. 현재 전국에 퍼져있는 약 227개의 지자체에 부천희망재단과 같은 지역재단이 활성화되기를 바라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이 더 밝고 삶의 질이 높은 곳이 되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 마웅저 Maung Zaw
    “세상을 바꾸는 건 무력과 시위뿐일 줄 알았죠. 그런데 한국에서 시민단체들을 보고 배우며 ‘교육’으로 사람도, 사회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참조: 버마의 현재 국명은 미얀마이지만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에 의해 미얀마로 바뀌었기에(1989년) 원래 국명인 버마를 사용하고 있다.
    미얀마 군사 독재 정부에 항거해 민주화운동을 하다 1994년 한국으로 피해오면서 이주노동자 생활과 한국사회의 시민운동을 경험하였다. 공장에서 일하며 동료들과 함께 버마 군부독재 반대 운동, 버마의 상황을 한국 사회에게 알리는 운동, 한국과 버마 연대운동, 그리고 한국 시민단체들에서 제공하는 교육들을 배웠다.
    그 와중에 시민운동과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그는 2003년부터 미얀마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교육지원활동을 시작하고 2010년 ‘따비에’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평화, 인권, 교육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활동을 통해 이 사회가 남의 문화, 남과 내가 가진 다른 가치에 대해 인정하고 존경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고자 한다.

    외국 동화책을 번역 출간하여 자국 어린이들에게 보급하는 동화책 보급 사업과 다른 나라와 연계하는 다양한 교육교류 프로그램은 버마 전체의 역량강화에 영향을 미치고 자국의 시민들은 물론 다른 나라 시민들의 인식변화와 지지를 이끌어 내며 버마 사회의 변화를 촉진하고 있다. 이외에도 버마의 민주화 소식을 자국민들에게 전하기 위해 진행된 피스라디오(peace radio) 캠페인(버마 국민들에게 라디오 보내기)은 애드보커시와 모금을 연결시켜낸 새로운 사례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앞으로 대안학교, 청소년센터 등 청소년을 지원하는 일을 다양하게 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정치는 정치가들이나 정부가 하는 게 아니라 시민들이 하는 것’이라는 말을 난 믿는다는 그. 청소년들은 바로 미래의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버마 현지에는 130개 언어가 존재하지만 교과서는 버마어 하나로만 쓰인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를 멀리하며 다른 언어, 다른 문화를 싫어하게 되고, 경제적인 이유로 학교에 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무상 교육을 제공하고 있음에도 초등교육 대상자 40%가 졸업을 못하고 있다는 UN 보고서가 이를 뒷받침한다.
    마웅저 대표는 나라의 미래를 만들어갈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 특히 국가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대안교육에 관심을 가지며 청소년들과 함께 그런 걸 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찾고자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전쟁, 국가 폭력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약자와 소수자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한다.
  • 노지향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환경에서 평등하게 살 수는 없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모두가 자기대로 당당하고 자기만의 향기와 생각을 자유롭게 뿜어낼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연극이 치유의 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역사는 고대 로마에서부터 시작됐다. 고대 로마에서는 카엘리우스 아우렐리아누스라는 의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에 기초하여 연극의 치유적 기능을 인정하고 흑담즙의 과다로 발생하는 멜랑콜리 증상의 치료를 위해 코메디 관람을 처방했다. 현대 사회에서도 심리적 안정과 정신적 문제를 완화시키기 위한 치유 목적의 연극이 많이 시행되고 있다.
    그중 대한민국 최초로 외국인 노동자와 소년원생 등을 위해 ‘치유 연극’을 도입한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공간-해’의 노지향 대표가 있다.
    노지향 대표는 새터민, 소년원생, 외국인 노동자 등 소외된 사람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치유 연극 및 성찰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그들의 상처 치유와 자존감 회복에 크게 기여를 하고 있다.
    “이 일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소년원생이라든지 재소자라든지 외국인 노동자, 노숙자, 탈북자 등 소위 소외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저는 제가 만난 사람들이 자기를 좀 더 돌아보고, 자기 자신을 표현해내고 그래서 예전보다 좀 더 당당해지고 건강해지도록 하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그녀는 1997년에 자비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 공간-해’를 설립해 소외된 여러 계층을 대상으로 연극 공연을 진행했다. 2010년 영등포 교도소 재소자 연극 ‘행복#’공연을 시작으로 50회 이상 소외계층과 제소자들을 위한 연극을 시행해오고 있다. 유관기관과 합의하에 소년원들의 문신 지우기, 남북 청소년 교류 프로그램, 기지촌 여성과 가족 관 관계 회복 등 다양한 후속 프로그램을 실시하기도 했다.
    '자기 성찰을 통한 참된 변화'
    잠시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 프로그램과 치유 연극을 주로 진행하고 있는 행복공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짧은 시간 동안 일생을 돌아보며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1.5평 독방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 ‘내 안의 감옥’이라는 프로그램은 지난 삶에 대한 위로와 참회, 그리고 비워내는 과정을 통해 자신 안에 갇혀 있던 집착과 습관들을 벗어낼 수 있도록 돕는다. 자기 자신 안의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애니어그램’ 프로그램은 궁극적인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자신의 모습과 일상생활을 무대 위에 옮김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트레스와 정신적 불안감이 해소되는 ‘생활 연극’ 프로그램도 있다. 숨겨진 자아를 발견하고 과거의 삶의 성찰과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통해 행복공장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자기 자신과 만나게 된다. 나이가 들어가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공장을 찾는다. 해가 갈수록 그 수는 증가하고 있다. 근본적인 변화에 기반한 행복한 삶을 새롭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노 대표가 꿈꾸는 사회의 모습'
    각자의 사연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그녀는 사람이란 더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으며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평등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재소자라고 해서 남을 배려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재소자이기에 나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 하나 하나가 모두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모두가 동등하게 귀중한 존재이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선입견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불평등한 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노 대표는 ‘이런 세상임에도’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기만의 색깔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환경에서 평등하게 살 수는 없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모두가 자기대로 당당하고 자기만의 향기와 생각을 자유롭게 뿜어낼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 옹달샘
    “빈곤과 결핍의 그림자는 넓고 무섭습니다. 옹달샘이 작은 학교 하나, 작은 마을 하나를 바꿀 수 있을지 몰라도, 전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민 자체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4년 2월 강원도에 위치한 민사고 학생들이 창립한 적정기술 동아리로 기아대책, 연세대학교, 울산과학기술원(UNIST) 등 국제개발과 적정기술 관련 기관과 협업해 개발도상국에 수자원 관련 기술 보급 활동을 해오고 있는 옹달샘은 활동기금 마련을 위한 모금부터 보급까지 학생들의 주도로 이어오고 있다.
    2014년 여름, 베트남을 시작으로 캄보디아, 라오스에 이르기까지 수자원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양한 국가들에 매년 적정 기술을 보급하고 있다. ‘적정기술’이라는 키워드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매년 울산과학기술원에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정수기에 대한 교육을 받는 등 조사와 연구, 학습을 거듭하고 있다.

    “모두가 고민하기 시작할 때, 변화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옹달샘은 특히 개발도상국의 열악한 물 부족 현상에 문제 의식을 느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고 있다. 현재 라오스 오지마을, 핫파인 마을의 물 문제와 위생 문제에 적정기술의 보급 필요성을 느끼고, 네이버 해피빈에서 모금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떠나도 계속 도움을 줄 수 있는 봉사’를 목표로 삼고 있는 이들은 현지 수자원과 환경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 해결로 지속적인 도움을 주고자 한다.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자기 환경과 수질을 개선해 나갈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옹달샘의 궁극적인 비전. 이런 옹달샘의 노력이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지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봉사에 직접 참여, 적정기술의 제공으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많은 문화 교류도 실시하여 현지 아이들에게 지적 자극과 꿈을 심어주고 있다. ‘봉사의 대상이 봉사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봉사’가 이들이 생각하는, 행하는 ‘봉사’의 의미이다.
    대부분의 고등학생 해외봉사동아리들은 정작 고등학생들이 직접 주도하지 않는다. 이제 4년차에 접어든 옹달샘은 ‘계획’부터 ‘모금’, ‘실행’, ‘보고’까지 학생들이 주도적,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을 이어간다는 데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들의 열정 어린 활동들은 입시를 위한 스펙으로서의 ‘봉사’가 아니라 세계 곳곳에 ‘진심’을 전하기 위한 진정성 있는 봉사임을 증명한다. 세계 빈곤국들의 아우성을 외면하지 않는 학생들의 진심과 그들이 느끼고 있는 책임감. 그것이 이들이 2017 APA 시상식에서 빛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빈곤과 결핍의 그림자는 넓고 무섭습니다. 옹달샘이 작은 학교 하나, 작은 마을 하나를 바꿀 수 있을지 몰라도, 전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민 자체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고민하고, 노력하는 옹달샘이 되겠습니다.”
  • 십시일밥
    “대학생들도 이렇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그런 가능성 같은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또 이렇게 대학생들의 시간이나 자기의 작은 노력을 들여서 남을 도울 수 있는 가능성들을 저희가 계속 열어 나가고 싶습니다.”

    절망하기 보다 희망을 찾고 포기하기 보다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나가는 대학생들이 있다. 바로 ‘십시일밥’에 참여하는 학생들이다. 십시일밥은 대학생들이 학교식당에서 공강 시간을 활용해 봉사를 하고 그 대가로 받게 되는 ‘식권’을 같은 학교에 다니는 취약계층 학우에게 ‘기부’하는 ‘대학생 교내 봉사 프로그램’이다.

    2014년 2월 한양대학교에서 시작해 2016년 12월 기준 전국 28개 대학(건국대, 연세대, 경희대(국제), 한국외대(글로벌), 서울대, 고려대, 경북대, 아주대, 단국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서울시립대, 숙명여대 등)으로 확산될 만큼 참여하는 대학교 뿐 아니라 기부자로 참여하려는 학생들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심각한 취업난과 경제난으로 이제껏 3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에서 2개가 더 늘어난 5포세대(인간관계,내 집 마련) 그리고 7포(꿈과 희망)세대 라는 표현에, 여기에 더 늘릴 숫자도 없어 N포세대로 언론에 묘사 됐던 대한민국 대학생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십시일밥은 현재 비영리 단체로 등록되어 있고 공강 시간에 학생식당에서 학생들이 한 시간 정도 일을 하면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게 아니라 식권을 받아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취약계층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김혜영 씨(십시일밥)

    십시일밥은 지금은 졸업한 한양대학교 경영학과 이호영 씨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따로 시간을 내지 않고도 일상 속에서 봉사를 할 수 없을까’라는 고민이 대학생, 취약계층이라는 사람들의 관계와 교내식당이라는 현실적인 공간과 맞물려 십시일밥만의 ‘식권 기부’라는 봉사 시스템이 탄생했다.

    '나의 시간을 기부하면 누군가에게 식권을 줄 수 있다'
    십시일밥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공강 시간’을 활용한 점이다. 시간을 따로 내거나 멀리 이동할 필요 없이 학생들은 캠퍼스 안에서 쉽게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 그것도 공간 시간 1시간이면 충분하니 부담도 덜 된다. 급여는 받지 않지만 대신 교내 식당 1끼를 제공받으니 기분도 좋다. 게다가 내가 땀 흘린 노동으로 누군가가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은 일상생활에 치여 봉사에 관심이 없었던 학생들을 십시일밥의 자원봉사자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뿐이랴. 학교 식당에서는 학생들의 자원봉사로 일손이 늘기 때문에 이득이다. 무엇보다 학교 전체에 나눔이라는 따뜻한 공감이 형성되는 점은 돈을 투자해서도 얻을 수 없는 가장 값진 결과다.
    “아무래도 대학생들이 대학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움직임이다 보니 그것을 사회에서 좋게 봐주시는 것 같고 많은 분들이 독려해주시는 부분이 좋았습니다.”

    '따뜻한 집밥을 대신할 따뜻한 학교밥'
    십시일밥의 정신은 고사성어 십시일반(十匙一飯 )의 의미를 그대로 담고 있다. 열 십, 숟가락 시, 한 일, 밥 반. 열 숟가락으로 한 그릇 밥을 만든다는 이 고사성어는 열 사람이 자기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 씩 덜어 다른 사람을 위해 밥 한 그릇을 만든다는 의미다. 자신의 시간을 내어 식권 기부를 함으로써 사각지대에 놓인 동기 또는 후배를 위한 한 끼를 만든다는 십시일밥의 나눔의 정신과 동일한 맥락을 가진다.

    “대학생들도 이렇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그런 가능성 같은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또 이렇게 대학생들의 시간이라든지 아니면 자기의 작은 노력을 들여서 남을 도울 수 있는 가능성들을 저희가 계속 열어나가고 싶습니다.”
  • 故김석산
    “아이들을 위해 50여년 평생 사회복지의 외길을 걷게 된 것이,
    바로 제 운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김석산 회장은 어린이 빈곤 문제의 해결이 빈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라는 생각을 전파하는 데 집중하였으며, 이에 따라 어린이 복지 사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였다. 후원자와 수혜아동들을 1대1로 결연을 맺어 기부자 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미아 찾기 사업을 통해서 아동들을 가족의 품으로 되돌려주기도 하는 등 아동들에게 집중하는 활동과 동시에 다양한 단체, 기업들의 후원을 통해 교육, 생활용품, 후원금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특히 We Start 시민운동을 통해 사회 모두가 힘을 모아 빈곤 어린이의 가난 대물림을 끊고 새 출발을 도와줘야 한다는 취지를 보여주었으며 학교, 사회복지관, 보건소, 지자체 등으로 구성된 지역교육 복지망 만들기와 공부방 및 보육시설 활성화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를 통해 빈곤층 아동이 공정한 교육을 받고 공정한 복지의 출발선상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TV 방송과 스타마케팅을 연계하여 사회적으로 필란트로피를 확산시켰으며, 북한을 위해 만경대 제2식료공장에 생산시설을 확충하여 ‘어린이종합식료공장’으로 재탄생시켰고, 평양 일대와 백두산 등지로 130여명의 대규모 방북단을 파견하기도 하는 등 대북지원활동에도 앞장섰다. 또한 한국 밖 베트남, 캄보디아, 스리랑카, 중국 등 각 빈민지역의 어린이들에게 교육비와 수술비, 생활비 등을 지원하였다.

    그는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 전문가로 자신을 경진하는 한편, KBS 사랑의 리퀘스트 운영위원회,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 등 다양한 사회복지분야의 회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외롭고 힘들게 자라온 성장기를 거쳐 그는 살아 생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아들딸을 둔 아버지로, 늘 새로운 후원자를 만나는 일로 24시간이 모자란 나날을 보냈다.
    “저는 후원자들의 후원금으로 배움의 기회를 얻었고, 후원자들이 보내준 글에서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저에게는 낳아주신 부모님도 계시지만, 저를 키워준 후원자님들 또한 저의 부모입니다. 제가 어린이재단의 회장으로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 평생 사회복지의 외길을 걷게 된 것은 바로 운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입버릇처럼 그가 하던 이야기다. 김석산 회장은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라는 단체의 브랜드가치만으로도 수혜자와 언론, 일반인들에 신뢰도를 얻을 수 있는 활동들을 수행했으며, 아동복지계의 역사로 인정받고 있다.
  • 김소희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배를 받은 어민들이 엄지를 치켜들면서 고마워했어요. 그분들이 좋아하니까 저도 많이 기뻤어요.”
    2015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 이었던 김소희 양은 ‘캄보디아의 어려운 가정에 배 보내기’ 프로젝트를 스스로 기획하였다. 직접 기획한 이 프로젝트가 현실이 되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그녀는 네이버 해피빈 모금에 자신의 계획을 올렸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지지를 보내주었다. 어린 소녀의 뜻에 동참하겠다고 자신의 돈을 기부하고 나선 사람만 총 460명이 되었고 모금액 300만원이 만들어졌다.

    그녀는 이 돈으로 4척의 배를 캄보디아의 가정 형편이 어려운 어촌마을의 가정 4곳에 기증하였다.
    19살의 어린 소녀가 이끈 변화는 캄보디아 어촌 마을의 4 가정의 자립을 도왔을 뿐 아니라 수백명이 넘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원하면 이룰 수 있다’라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확실히 변화를 이끄는 이러한 행동은 쉽지 않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그는 문제집보다 불우한 이웃을 바라보았고 틀린 문제의 정답을 맞추기 보다 불쌍한 주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고등학교 3학년 밖에 되지 않는 학생이 300만원이란 거금을 모아 한국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이유에는 이렇게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나눔에 대한 그녀의 관심 덕분이었다.

    또한 학교에서는 재학생과 교직원들이 참여하는 ‘나만세프로젝트(나눔으로 만나는 세상)’를 분기별로 전개하여 기증품을 모아 굿윌스토어에 전달하고, 전교생을 대상으로 나눔교육이 만들어지도록 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행보는 한국스카우트연맹의 실천사례로 선정되어 교육 자료로도 활용되었으며, 각종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오랜 기간 타인을 돕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 발로 뛴 김소희 양은 ‘적정기술’에 관심이 많다.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란 그 기술이 사용되는 사회 공동체의 정치적, 문화적,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해당 지역에서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술로, 인간의 삶의 질을 궁극적으로는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을 일컫는다. 적정기술을 활용하는 환경 전문가가 되어 해당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에너지를 개발해 그 지역의 경제 자립을 돕는 것이 김소희 학생의 꿈이다.
  • 수카와티 재단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단지 지원을 받는 삶이 아닌, 스스로 지속가능한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우리 재단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Q : 네팔의 Sukhawati 재단 창립 동기 및 목적에 관해 이야기 해 달라.
    한국에 머무는 동안 저는 아름다운재단에서 기증받은 물품들을 팔아 자선기금을 모으는 매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곳은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이상적인 사회적 기업이었다. 그 덕분에 2012년 모국 네팔로 돌아왔을 때 저의 고국에서 그와 같은 곳을 창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옷 같은 것도 네팔의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나는 옷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계절에 맞는 의류를 제공하는 것은 더위와 추위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인류에게 커다란 봉사이다.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옷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품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보다 명목상 저렴한 가격으로 그런 것들을 제공하게 되면 받는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자존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팀원들과 제가 가진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의류 및 사용하지 않은 새 상품의 물품을 기부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음식을 제공 할 수 있는 자선 활동에 관해 이야기 해주었다.

    처음에는 거리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 후에는 이사회 멤버 중 한 곳의 차고에서 판매 상점을 운영하게 되었다.
    우리 고객들은 우리에게 정식 판매 매장을 설립하는 것을 권장해주었고 고생 끝에 우리는 매장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몇 시간 만에 팔십 달러 가치의 여러 상품들을 팔 수 있는 그런 매장이 되었다. 현재 Samakhoshi에 우리 매장이 위치해있으며 카트만두는 여러 시련의 단계를 거쳐 저희 매장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Q : Sukhawati 재단에서 진행 중인 주요 활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Sukhawati 재단에는 두 가지 주요 프로젝트가 있다. 하나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의 생계를 위한 프로젝트이며 다른 하나는 재사용 가능한 물품을 판매하는 매장이다. 생계와 관련한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Dakshinkali Municipality-9의 Talkhu와 Gorkha의 Thalagung Village에서 “Namaste Agriculture Project”라는 농업을 가지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야채 및 농작물을 홍보하여 수입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지역 사회 사람들의 영양을 보장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우리는 그 지역 여성 단체 및 협동조합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프로젝트 수행해 왔다. Sukhawati 재단은 채소 재배, 양수 관개 지원, 통합 해충 관리, 폐기물 관리, 수자원 관리 훈련 및 식물 특정 훈련에 대한 교육을 제공한다.

    현재 약 250명의 여성이 생계 사업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독립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판매 매장의 경우, 3명의 직원 및 4 명의 자원 봉사자를 통해 운영되고 있다. 우리는 가정용으로 사용되는 의류 및 제품을 제외한 재사용이 가능한 모든 연령대 및 성별의 물품을 판매한다. 매년 우리는 약 4000달러 가치의 2톤의 재사용이 가능한 옷을 판매한다. 이는 환경오염을 줄이는 데에도 기여한다. 또한 이 프로젝트를 통해 월 100-150달러의 수입으로 기본적인 생활물품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과 가정용품을 제공한다.
    Q : Sukhawati 재단은 어떻게 독특한 사회적 기업이 되었는지?
    농업과 관련하여 우리는 토착 기술 및 제품을 홍보하고 지역 주민 및 협동조합과 협업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네팔의 농촌 지역 여성 단체들에게 권한을 부여한다. Sukhawati 재단의 의류 매장에서는 루피 10에서 250 사이의 가격대에서 제품을 판매한다. 이를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쉽게 매장에 와서 옷을 구입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자원 봉사자가 중심이 되는 단체이며 네팔 카트만두의 어린이 및 노인 대피소에 현금과 농산물을 제공하고 있다.

    Q :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에서의 수상은 Sukhawati 재단 및 재단 회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나?
    이런 권위 있는 상을 수여받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이 상은 네팔 내외의 사람들과 조직들의 규모 및 영역을 확대 시키게 해주었다. 또한 회원, 직원 및 자원 봉사자가 활발히 봉사 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 해주었다.
    Q : 앞으로 극복해 나가야 할 주요 과제는 무엇인가?
    네팔에는 사회적 기업을 위한 구체적인 정책이 없다. 사기업 및 사회적 기업 모두 동일한 조건 하에서 정책이 적용 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정부 측으로부터 이끌어 와야 할 등록, 세금, 감사, 갱신 및 감독에 관한 여러 극복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Q : 어떻게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에 관해 알게 되셨나요?
    A): 2015년 네팔의 지진 피해자들에게 구호 물품을 전달하는 저희 재단을 본 한국인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의 노력에 감사를 표하며 2018년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에 지원하기를 것을 권유했다.
    Q : Sukhawati 재단의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
    빈곤 퇴치를 위한 시범 사업이다. 우리의 계획과 영향력을 유지할 협동조합 및 지역 사회 단체와 협력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우리 재단이 운영하는 프로젝트를 최소 비용으로 네팔의 다른 지역에서도 구현할 수 있다.
    향후에는, 네팔 전역에서도 유명한 대부분의 농산품을 공급하는 Sukhawati 매장을 만들고 싶다. 또한 네팔에서 이상적인 사회적 기업으로서 더 전문화되기를 원한다.

    Q :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신지?
    네팔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권한을 부여하는 일을 하고 있는 저희 Sukhawati 재단과 함께 해주시기를 바란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 승일희망재단
    “기부라는 것이 나보다 어려운 누군가를 돕는다는 의미를 벗어나, 내가 행복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몸과 마음으로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말할 수도, 숨 쉴 수도, 사랑하는 사람을 안을 수 없다. “그래도 난 살아있다.”
    2011년에 설립된 승일희망재단은 루게릭병을 이해하고 체계적으로 간병할 수 있는 루게릭 요양 병원 건립이 최우선 목표다. 또한 루게릭병 환우와 가족들의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다양한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시련 속에 찾아오는 선물, 아이스버킷 챌린지 “재단 운영의 대한 지식을 전혀 모른 채 시작했다. 꿈과 열정으로 시작한 것이다. 현실의 벽을 마주한 순간마다 선물이 나에게 찾아왔다. 릴레이 기부 캠페인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저에게 선물 같았다. 찬 얼음 물을 한 번에 쏟아붓고 3명의 지인에게 지목하는 SNS 캠페인을 션 대표님 1명의 시작으로 유명 스타들이 함께 참여해주었다. 결국 2018년 9월 15일, 918명이 동시에 참여하는 아이스버킷 챌린지 행사도 할 수 있었다. 기적과 희망이 저에게 조금씩 다가오는 일이 된 것 같았다.”
    삶이 지속되는 한 희망은 있으니 마음까지 닫지 마라, 삶이 아무리 불행한 것 같아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 박사 -

    승일희망재단 로고는 루게릭병 환우를 위한 캠페인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기념하며 항상 응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제작되었다. 나선형의 선은 물이 쏟아지는 순간으로 아이스버킷을 뒤집어쓴 사람의 모습을 상징한다. 동시에 어깨동무한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며, 이는 마음을 함께 한다는 의미를 표현이다.
    희망의 끈을 이어갑니다.
    “재단 직원들의 평균 나이는 30대 초이다. SNS으로 활발히 많은 후원자 및 관심 가져주시는 모든 분들과 소통하고 있다. 젊은 직원들이 힘써준 결과인 듯 하다. 기부상품을 판매하는 승일희망재단 기부상품 공식 쇼핑몰 ‘위드 아이스’도 젊은 직원들이 함께 하고 있다. SNS의 게시 글에도 내가 소소히 소통하려 하는데 종종 젊은 직원이 글귀를 고쳐 주곤 한다.”

    든든한 지원군과의 동행 2016 APA 올해의 NPO 수상
    “수상 받는 2015년, 2016년에는 승일희망재단이 알려지지 않을 시기였다. 추천을 받고 수상이 되었다는 소식에 재단의 활동을 자세히 알고 계신 분께 놀랐다. APA의 많은 전문 심사위원의 참여와 공정성에 두 번 놀라게 했다. 나에게 선물같이 다가왔다. 그리고 상금이 없어서 더욱 자랑스러웠습니다. 수상을 받고 난 이후 승일희망재단을 이야기할 때 APA 수상 이야기는 빼지 않고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전문가의 평가와 공정성이 승일희망재단에 증명되는 수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는 수상의 기준이 승일희망재단의 기준이 되어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고, 운영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공정성과 투명성에도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어느 활동을 할 때마다 든든한 느낌을 받곤 한다. 작은 재단에 큰 힘이 된 APA 수상, 앞으로의 APA 활동에도 응원할 것이다.”
    Dreamer. 꿈꾸는 사람들
    작은 병실에서의 꿈, 그 꿈은 작은 꿈이 아니었다. 루게릭병 환우와 가족들을 위한 병원 건립의 꿈을 이야기하고 응원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은 너무 커서 가능할까 하는 작은 마음이 있었다. 혼자의 생각이 아닌 함께 모여 여럿이 모두의 꿈이 되었다. 병원 건립을 위한 토지를 구입했다. 사용하는 환우, 가족, 간병인 모두가 편히 이동할 수 있는 위치를 고려했다. 아직 병원 건립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꾸준히 함께 이루어 가길 희망한다. 모두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고 기쁨이 공존하는 공간을 건립하는 것, 존재만으로 힘이 될 수 있는 병원을 희망하고 있다.
    운동신경세포가 마비되는 루게릭병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불가능한 것들은 점점 많아진다. 하지만 생각은 할 수 있다. 생각하는 힘만으로도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희망을 품은 승일희망재단. 그 희망을 응원하고 실현될 수 있기 위해 승일희망재단이 존재한다. 2016년 올해의 NPO 상을 수여받은 승일희망재단의 앞날을 기대해본다.
  • 스마일재단
    “장애인이 편하게 부담 없이 오고갈 수 있는 그런 치과. 비장애인들이 흔히 접할 수 있는 병원을 장애인들에게도 누리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2월 22일 스마일재단의 시작
    1년 365일 중 숫자 2가 가장 많이 들어가 있는 날, 치아의 날이라고 해도 될까? 2003년 2월 22일 창립총회를 시작으로 스마일재단은 시작되었다.

    - 김건일 이사장: 비장애인들도 병원 중 치과를 특히 무서워하는 성향이 있다. 장애인은 더욱 더 심하게 무서워한다. 장애인에게 치과 치료는 시간은 2배로 들어가고 노력은 3배 더 들어가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장애인들은 치과에 가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와주고자 하는 게 저희 스마일재단의 작은 마음이다. 치과의사 10명이 모여서 시작해서 16년째 활동한 스마일 재단. 저소득층 장애인 지원 사업도 중요하지만, 비장애인, 장애인 모두가 가지고 있는 장애인 인식 개선 사업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성식 명예 이사장: 어느 날 정기기부 5천 원이 등록되었다. 감사 인사를 드리며 후원 참여 사유의 대하여 문의해보니, 사실은 지원받으신 저소득 장애인 분이셨다. 내가 이렇게 지원받았는데 할 수 있는 만큼 후원해주시는 것이라고 답변 주시는데 작게나마 눈물이 나오더라.
    작은 회의실 한편에 빼곡히 쌓인 서류
    - 나성식 명예 이사장: 보철 치료 지원 신청서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아두고 있다. 100개의 지원서가 들어오면 90개는 지원을 받지 못한다. 모든 분들을 지원 드리지 못하여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소중히 써주신 지원서인데 왜 못 받으셨는지조차 답변을 드리지 못하면 안 되겠다는 마음에 모두 모아두고 문의가 있으면 하나하나 안내해 드리고 있다.
    - 김건일 이사장: 사회에서 근무도 하고 재단도 운영하는 일은 체력적으로 힘겨운 일이다. 그러나 더 힘든 건 모든 분들 게 지원해드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음이 아파 더 이상은 심사에 참여하지 않고 다른 이사님들께 안내드렸다.
    - 김민경 팀장: 기금 지원 사업은 1차와 2차가 있다. 1차에 선발되셨으나 거부 및 연락이 닿지 않으면 2차로 넘어간다. 2차에 선정되신 분께 연락드리니 그 사이 돌아가신 분이 계셨다. 조금 더 일찍 지원에 연락을 드렸다면 건강이 유지가 되어 조금은 웃고 계시지 않으셨을까 했다. 짧은 6개월의 기간이다. 작은 지원 사업이나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신중하게 일하고 있다. 지원 받으신 많은 분들이 종종 감사 인사 전화를 주신다. 우리가 흔히 먹을 수 있는 고기, 김치를 이제는 아삭아삭 드실 수 있다는 환영의 소식을 한통 주시면 더욱 더 힘이 나곤 한다.
    APA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시는 나성식 명예이사장
    APA 수상은 우리에게 있어 명예를 받은 듯 했다. 상금이 없는 시상식이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명예를 알리고, 떳떳하게 지원 사업 안내하며, 모금 요청을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기금 모금이 증진하게 되었다. 기금 모금이 되었다는 것은 지원 사업이 증가하며 저소득의 장애인이 지원을 받는다는 의미다. 우리의 꿈이 한 뼘 자란 일이다. 수치상으로 나와있진 않지만 APA 수상은 내부적 동기부여와 외부적 모금에 긍정적인 영향에 한 발 도움을 주었다.

    스마일이 여는 세상
    한국 장애인의 치과 첫 방문 나이는 14.7세, 옆 작은 나라 일본의 경우는 1.8세입니다. 간단한 조사를 봐도 한국 장애인의 치과 치료 상황을 알 수 있다. 첫째로는 장애인 인식개선이 매우 중요하며, 두 번째로 장애인을 위한 치과가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의 불편함을 조금씩 바꿔가고 있다. 어린 장애인들이 뛰어놀며 치료받을 수 있는 공간, 교통시설이 잘 되어 있는 공간에 있는 병원, 비 장애인들은 흔히 접할 수 있는 병원을 장애인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
    모두가 함께하는 스마일재단
    매월 1회 스마일재단 소식지가 발송된다. 혼자의 힘이 아닌 모두의 힘으로 만들어 제작하는 소식지. 소식지의 가치는 천만 원 이상이라고 이야기하는 나성식 명예이사장. “그들의 마음과 시간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천만 원 그 이상의 가치가 아닐까?” 그들이 있는 곳에는 그들이 만든 스마일이 있다.
  • 이광재
    “기부가 하나의 일상이자 기업 문화로 정착되어, 기부를 받는 사람뿐이 아닌 기부를 하는 개인이나 조직의 삶도 함께 변화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Q : 본인 소개 부탁드린다.
    제 1 회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에서 올해의 펀드레이저상을 받았던 사회복지사 이광재이다. 당시에는 아픈 아이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한 단체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장애 없는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사회복지법인 따뜻한 동행에서 상임이사 일하고 있다.

    Q : 어떤 계기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첫 시작 하였는가?
    유년 시절에 누군가를 돕는 것이 참 보람된 일이라는 것을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늘 베푸는 삶을 살고 싶었던 나는 청소년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러던 중 학력고사를 100일정도 앞두고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삶”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었고, 사회복지를 전공하게 되었다.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제가 가장 잘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검증하고 싶었는데,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확신을 갖게 되어 졸업과 함께 모금을 하는 사회복지사로 시작하게 되었다.
    Q : 남을 돕는 필드에서 활동한 기간이 오래되었다. 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20년이 조금 넘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 도왔던 일들은 전혀 특별한 것이 없었다. 단지 다른 사람들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자리를 양보하거나 짐을 들어드리는 일 그리고 길을 잃으신 분들에게 안내해 드리는 일과 같이 아주 작고 소소한 일들을 할 뿐이다. 기부 역시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처럼 제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일들을 위해 작은 나눔을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 이상 현장에서 일할 수 있었던 힘을 생각해본다면, 끊임없이 우리사회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과 그로 인한 사람들의 필요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필요를 채워주고자 문제 해결 방법을 찾다 보면 내가 알지 못하던 많은 분들이 자신의 필요처럼 나와 함께 해 주고 있었다. 그러한 많은 만남들을 갖다 보니 벌써 20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자신의 일처럼 나누어 준 많은 분들과 그 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지금처럼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Q : APA 수상 이후 변화한 것이 있다면?
    벌써 5회라고 하니 상을 받은 후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제 삶에도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 우선, 제가 상을 받는 날, 현장 학습을 내고 시상식에 함께했던 초등학생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고 저의 일터도 바뀌었다. 또한 현장에서 늘 궁금해하던 비영리단체의 광고 메시지의 효과에 대한 내용으로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러나 내가 가장 많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일을 처음 시작했던 첫 마음’을 기억하게 되었고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 년간 좋은 의도와 큰 성과를 내고도 현장을 떠나는 많은 분들을 봤다. 하지만 APA 상이 저에게 첫 마음을 간직하고 지킬 수 있도록 하였고 그래서 지금도 현장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치기 쉬운 현장에서 처음주신 마음으로 지금도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한다.

    Q : 이광재 수상자님께 APA란?
    어린 시절 비를 맞고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께서 따뜻한 말씀과 함께 마른 수건으로 닦아 주셨던 기억이 있다. 저에게 APA는 조금 혼란스럽고 지쳐갈 때 “지금까지 아주 잘 해왔고... 앞으로도 잘 할꺼야.” 라는 따뜻한 격려였다.

    Q : 마지막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
    필란트로피스트 한 사람을 격려하는 일은 단순히 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평생 만나게 될 수백, 수천의 사람들의 변화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해마다 APA를 통해 세워지는 필란트로피스트들은 수 많은 사람들을 세우고 그들은 또 다른 나눔의 기적들을 만들어 갈 것이라 생각한다. APA에서 하는 일들이 단순한 시상식이 아닌 매해 수 많은 사람들을 세우고 격려하는 일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부족한 저에게 멋진 상을 주신 APA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감사합니다.
  • 김이경
    “캠페인 기획을 펼치는 과정에서 누군가 우리와 함께 공감하고 동참한다는 것이 기적 같습니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이런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제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Q : 본인 소개 부탁드린다.
    월드비전 서울남부지역본부에서 후원개발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이경 차장이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월드비전에서 17년간 근무를 하고 있다. 사랑의 빵 동전모으기, 기아체험24시간, 사랑의 동전밭, 사랑의 빵 나눔 단말기 등의 모금 프로모션을 기획하고 진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부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Q : 어떤 계기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첫 시작 하였는가?
    처음에는 막연한 생각으로 좋은 일,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전공을 사회복지학으로 선택했다. 처음에는 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기 위한 준비를 했으나 우연한 기회에 월드비전의 후원개발 업무를 하게 되었는데 사회복지사의 마인드를 가지고 후원개발 업무를 하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신기한 경험으로 가득했다. 그러면서 이 일이 적성에 맞다 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만족하면서 일하고 있다.
    Q : 남을 돕는 일에 활동기간이 오래되었다, 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꾸준한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변화를 경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도움이 전해졌을 때 그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나눔을 실천한 사람들의 생각과 삶이 자연스럽게 물이 스며들 듯 삶 속에서 나눔의 소중함을 인정하며 아름답게 변화하는 모습을 봤을 때 그 감동은 그 어떤 것 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람과 기쁨으로 선물처럼 힘을 주곤 한다.
    Q : 사회 활동을 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일화는 무엇인가?
    몇 년 전 여러 사회복지법인의 담당자 회의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어떤 한 분이 저를 알아 보시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저는 그 분이 누군지 전혀 기억이 없었는데 그 분의 말이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행사에서 차장님의 강연을 듣고, 행사에 참여하면서 많은 감동을 받아 복수전공으로 사회복지를 배웠고 지금은 이렇게 사회복지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내가 경험한 것을 알리고, 우리가 하는 일들의 필요를 다양한 기획을 통해 펼치는 과정에서 누군가 우리들과 함께 공감하고 동참한다는 것이 기적과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러 구석구석에서 이런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큰 감동으로 다가 오는 일화이다.

    Q : APA 수상 이후 변화한 것이 있다면?
    자신감이 더욱 충만해 졌다. 지금까지 인정과 보상을 받기 일한 적은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생각하지도 못한 APA 수상은 저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자신감과 믿음으로 밀고 나가라는 메시지와도 같다. 그래서 수상 이후에 더욱 많은 새로운 기부문화 창출을 위한 아이디어와 도전을 이전 보다 열심히 추진하고 있다.
    Q : APA 는 어떤 의미인가?
    새로운 도전을 꿈 꿀 수 있게 도와준 선물이다. 자칫 지금까지 하고 있었던 일들에 안주하며 어느 정도 만족하며 지낼 수 있었던 저에게 머물지 말고 새롭게 도전하라고 응원해 주는 인생의 소중한 선물과 같았다. 매번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기에 감격하며 감사했던 지난 시간들도 다시금 생각나게 해 주었고, 앞으로 더 많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도 했다. 정말 인생에 있어 최고의 선물이다.
    Q : 마지막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
    우리가 함께 살아 가고 있는 이 사회에서 정말 귀하고 보석 같은 헌신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고 계신 수 많은 동역자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동역자들로 인해 우리의 세상은 지금보다 더 아름답게 변화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때로는 힘들고 억울하고 외롭다 느낄 수 있으나 언제나처럼 사명 앞에서 넉넉히 이기며 전진하는 그 모습을 함께 걸으며 응원할 것이다. 사랑한다.